'시(詩)'에 해당되는 글 46건

  1. 2008.03.03 [김현승] 평범한 하루
  2. 2008.02.11 [이수명] 또 하나의 탈출
  3. 2008.02.11 [이수명] 비명 소리
  4. 2008.02.06 [기형도] 빈 집
  5. 2008.02.06 [이수명] 너의 얼굴
  6. 2008.02.02 [김수영] 눈
Scrap/Poetry2008.03.03 19:58
파초는 파초일 뿐,
그 옆에 핀
칸나는 칸나일 뿐,
내가 넘기는 책장은 책이 되지 못한다.

의자는 의자일 뿐,
더운 바람은 더운 바람일 뿐,
내가 누워 있는 집은 하루종일
집안이 되지 못한다.

그늘은 또 그늘일 뿐,
매미소리는 또 매미소리일 뿐,
하루종일 비취는 햇볓이
내게는 태양이 되지 못한다.

넝쿨장미엔 넝쿨장미가
담은 담일 뿐
차라리 벽이라도 되지 않는다.
나는 그만큼 이제는 행복하여져 버렸는가?

Posted by Lynn*
Scrap/Poetry2008.02.11 17:13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멀었다. 상점들은 문을 닫았다. 어둠 속에서 길은 보이지 않게 구부러졌다. 길을 잡아당기는 내 손은 물집투성이였고, 손톱은 자꾸 부러졌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발은 놀란 듯이 땅에 떨어졌다. 발은 힘센 어둠을 밀고 걸어가기가 어려웠다. 거리에서는 한 블록을 지날 때마다 매복되어 있는 짐승을 만났다. 짐승들은 어디선가 갑자기 뛰쳐나와 나를 뛰어넘으며 으르렁거렸다. 나는 가끔씩 뛰었다.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나를 앞질렀다. 나는 뛰었다. 헉헉대며 가까스로 집에 당도해 나동그라졌다. 그때 쓰러진 채 나는 본 적도 없는 거대한 짐승 하나가 내 안에서 뛰쳐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 짐승은 지붕을 넘어 사라졌다. 지붕의 기왓장들 하나하나가 차례로 떨어져내렸다.

Posted by Lynn*
Scrap/Poetry2008.02.11 17:09
비명 소리를 들었다.

아무도 없는데

빈방인데
빈병들을 일렬로 세웠을 뿐인데

비명 소리를 들었다.

어두웠는데

어두워서
커튼을 조금 열었을 뿐인데

벽을 타고
비명 소리가 마구 올라갔다.
나도 따라 올라갔다

이 벽에 사다리를 걸치고
저 벽에 사다리를 맞추고

입 없는 사다리들

복제된 사다리들

올라가다
사다리를 벽에서 떼었는데

화살들

사방에서 화살들이 날아왔다.
날아와 부러졌다.

비명 소리를 들었다.
내가 지른 비명 소리

부러진 화살의 비명 소리

Posted by Lynn*
Scrap/Poetry2008.02.06 13:09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Posted by Lynn*
Scrap/Poetry2008.02.06 13:06


빌딩들 속에서 너의 얼굴은 둥근 바위와 같았다. 빌딩과 빌딩 사이로 그렇게 천천히 허공을 굴러가는, 허공중에 떠 있는, 멈춰버린 바퀴. 정오였다. 너의 얼굴은 멈춰버린 바퀴였다. 가시덤불을 헤치고 있는 태양이 가시덤불이 되는 시간, 가시들 하나하나가 태양빛이 되어 빛나는 시간, 사람들이 더 이상 굴러가지 않는 바퀴들로 멎고 있었다. 너를 막고 너처럼 허공에 서 있는 군중들. 매달려 있는 도시의 외바퀴들. 너는 그들에게서 빠져나가지 못했다. 네게서는 심한 탄내가 났다.


Posted by Lynn*
Scrap/Poetry2008.02.02 01:41


눈이 온 뒤에도 또 내린다

생각하고 난 뒤에도 또 내린다

응아 하고 운 뒤에도 또 내릴까

한꺼번에 생각하고 또 내린다

한 줄 건너 두 줄 건너 또 내릴까

폐허에 폐허에 눈이 내릴까



<1966. 1. 29>

Posted by Lyn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