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rap/Poetry2008.07.10 22:56

[살아남은 자의 슬픔]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 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 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강한 자가 살아 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Ich der Überlebende]

Ich weiß natürlich: einzig durch Glück
Habe ich so viele Freunde überlebt. Aber heute nacht im Traum
Hörte ich diese Freunde von mir sagen: “Die Stärkeren überleben”
Und ich haßte mich.

(1944)
Posted by Lynn*
Scrap/Poetry2008.07.03 00:16
맹세코 나는 그녀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쩌면 내가 죽을 때 그녀를 마리아라고 부르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건 시인의 변덕 때문이 아니라
그 이름이 가지고 있는 마을의 광장 같은 분위기 때문입니다.
그 시절! 나는 허수아비였고
그녀는 늘 창백하고 어두운 표정이었죠.
고등학교 시절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던 어느 날 오후
그녀의 죽음을 알게 되었죠.
아무튼 그 소식이 내게는 큰 충격이 되었던 모양입니다.
눈물을 다 흘렸으니까요.
그래, 눈물이었어요! 눈물! 믿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모습이 내 진면목이었죠.
그녀가 죽으면서 눈동자에 내 이름을 간직했다는
사실을, 한치의 의심도 없이, 믿기로 했습니다.
그 사실은 무척 나를 놀라게 했죠. 외내하면
내게 그녀는 친구 외에 다름아니었으니까요.
단순한 의례적 관계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으니까요.
별 의미 없는 대화와 대화들
제비들처럼 나누었던 이런 저런 잡담들.
나는 그녀를 고향에서 알게 되었죠 (고향이
내게 남겨 준 것은 한 줌의 재밖에 없지만)
꽤 어린 시절부터 그녀의 비극적이고
철학적인 운명이 보이더군요.
그런 것들이 나로 하여금 그녀를
마리아라는 고상한 이름으로 부르게 했는지도 모릅니다.
한 번인가 그녀와 키스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여자 친구와 키스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내 경우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나는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것을 했으니까요.
그녀의 애매모호한 태도를
좋아했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것은 마치 집에서 키우는
꽃에 혼을 불어넣는 그런 어떤 것이었습니다.
그녀의 미소가 지녔던 어떤 의미를
완전히 숨길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돌멩이조차 감격시켰던
그녀의 부드러움을 잊을 수는 없겠지요.
밤이 되면 그녀의 눈은
믿을 만한 샘물이 되곤 했지요.
그러나 이런 여러 가지 사연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밝혀 두어야 할 것은 나는 그녀를 사랑한 것이 아니며
어떤 환자에게 향하는
알 수 없는 막연한 감정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지금도 나를 뜨겁게 하는 것은
한 여인이 그 눈동자에 내 이름을
떠올리며 죽어 갔다는 사실입니다.
그녀는 티없는 장미이며
진정한 등불입니다.
사람들이 밤낮으로 이렇게
불평하는 것은 당연한지도 모릅니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상이
멈춰 버린 바퀴보다도 못하다고.
하나의 무덤이 더 명예로울지도 모른다고.
곰팡이가 잔뜩 낀 낙엽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
그 어느것도 진리가 아니며, 이곳에서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안이 들여다보이는 유리의 색깔처럼


오늘은 푸른 봄날입니다.
내가 죽을 때는 시를 쓰고 있거나
우수에 잠긴 그녀를 부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름조차도 기억하고 있지 못하지만.
도망다니는 비둘기처럼
그녀는 이 세상을 빠져 나갔죠.
그리고 이 세상에 모든 일이 그런 것처럼
천천히 그녀를 잊어 가겠지요.


Posted by Lynn*
Scrap/Poetry2008.07.03 00:07
세상의 모든 문제를 걸머진 채
천박하고 별 볼일 없는 인간처럼
온갖 인상을 다 쓰고 계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우리들 때문에 더 이상 심려치 마옵소서.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
노심초사하고 계심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께서 애써 지으신 것을 악마가 망가뜨려서
심기가 몹시 불편하심도 알고 있습니다.

악마가 당신을 비웃는다 할지라도
너무 신경 쓰지 마옵소서.
당신을 위해 우리가 눈물을 흘리고 있지 않습니까.

별로 충성스럽지 못한 천사들에게 둘러싸여
어딘가에 계시기는 계신 우리 아버지
진실로 말씀드리거니와
더 이상 우리 때문에 괴로워하지 마옵소서
당신께서도 인정을 하셔야 될 겁니다.

하나님도 실수할 때가 있다는 것을
그래서 우리가 모든 것을 용서하고 있다는 것을.


Posted by Lynn*
Scrap/Poetry2008.07.03 00:03

몇 해가 가고, 몇 해가
또 가고 그래서 바람이 당신의 영혼과
내 영혼 사이에 커다란 구덩이를 만들고, 그렇게
그렇게 몇 해가 가고, 그래서
내가 정원을 배회하다 지쳐 버린 불쌍한 사나이가,
누군가를 사랑했던 사나이가,
그대의 입술 앞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던
추억의 사나이가 되었을 때.
그대는 어디에 있을까? 오, 내 첫입맛춤의 여인이여,
그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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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브레히트를 빌리려고 했다. 그런데 비가 왔던 탓에, 서반아어 서가로 발걸음이 옮겨졌다. 니까노르 빠라(Nicanor Parra)의 시집을 집어들었다. 브레히트는 다음 기회에 읽기로 했다. 책을 펴자마자 저 시가 맨 처음에 보였다.

…….

Posted by Lynn*
Scrap/Poetry2008.03.30 01:04
바람아 나를 묻어다오
정든 이 아무도 오지 않고
떠도는 저녁과
고요한 대지의 숨결만 찾아든다.

너처럼 자유롭던 나
너무도 살고 싶었다.
아무도 돌볼 이 없는 차가운 내 육신을
바람아, 보아라.

저녁이 만든 어둠의 옷으로
이 검은 상처를 덮어다오
내 위에서 시를 읽어주고
푸른 안개에게 전해다오.

바람아! 마지막 잠이 든
외로운 내 영혼을 위하여
내 봄을 위하여
키다리 사초처럼 울어다오.

── 1909년, 끼예프
Posted by Lynn*
Scrap/Poetry2008.03.30 00:53
잔다르크와 화형대에 오르기 위해
모로조바와 함께 기도해야하는 나는
헤롯의 의붓딸과 춤을 추다가
디도의 화형대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주여! 보시지요
나는 부활에 죽음에 삶에 지쳐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가져가세요, 그러나
이 빨간 장미의 신선한 향기를
다시 느낄 수 있게 해 주십시오.

── 1962년, 꼬마로보

Posted by Lynn*
Scrap/Poetry2008.03.21 08:49
*해석은 일종의 참조물. 전적으로 신빙하시면 곤란합니다. 중세영어 연구하는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시 번역가는 더더욱 아니니.


                   Sonnet 116

Let me not to the marriage of true minds
Admit impediments. Love is not love
Which alters when it alteration finds
Or bends with the remover to remove.
O, no! it is an ever-fixed mark
That looks on tempests and is never shaken;
It is the star to every wand'ring bark,
Whose worth's unknown, although his height be taken.
Love's not Time's fool, though rosy lips and cheeks
Within his bending sickle's compass come.
Love alters not with his brief hours and weeks,
But bears it out even to the edge of doom.
     If this be error, and upon me proved,
     I never writ, nor no man ever loved.


진실한 마음과 마음의 결합에
어떠한 장애물도 용납치 않기를.
변화가 온다 하여 변하거나,
변심을 한다고 해서 휘어지는 것은 사랑이 아니오.
오! 사랑이란 폭풍우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단단히 고정된 지표라네.
사랑은 모든 표류하는 배에게 별과 같은 것.
그 높이는 알 수 있지만, 진가는 알 수 없다네.
사랑은 시간의 어릿광대가 아니어라. 비록 장밋빛 입술과 뺨은
시간의 휘어진 낫에 걸려든다 하더라도.
사랑은 짧은 시간 안에 변하는 것이 아닐진저.
이는 최후 심판의 날까지 함께 하는 것이라네.
      만약 이 말이 틀리다는 것을 내게 증명한다면
      나는 결코 시를 쓴 적이 없고, 그 어떤이도 사랑한 적이 없으리라.


Posted by Lynn*
Scrap/Poetry2008.03.15 22:09

너는 얼룩말을 내리쳤다.
얼룩말의 목을 내리쳤다.

너는 이제 없다.

얼굴 없는 얼룩말들이
날마다 속삭이며
떼지어 네게 엉켜들었다.

핑핑 돌아가는 바람개비같이
얼룩말
얼룩무늬들이 빙글빙글
너를 태우고 다녔다.

너를 태운 얼룩말은 시작되지도
끝나지도 않았다.
얼룩말 위에서 너는 시작되지도
끝나지도 않았다.

하나의 얼룩말이
네게 갇힌 후

빠져나가지 못하고 모든
얼룩말들에게
너는 갇혀버렸다.

Posted by Lynn*
Scrap/Poetry2008.03.15 21:54
하루 종일 지친 몸으로만 떠돌다가
땅에 떨어져 죽지 못한
햇빛들은 줄지어 어디로 가는 걸까
웅성웅성 가장 근심스런 색깔로 西行하며
이미 어둠이 깔리는 燒却場으로 몰려들어
몇 점 폐휴지로 타들어가는 午後 6시의 참혹한 刑量
단 한 번 후회도 용서하지 않는 무서운 時間
바람은 긴 채찍을 휘둘러
살아서 빛나는 온갖 象徵을 몰아내고 있다.
都市는 곧 活字들이 일제히 빠져 달아나
速度 없이 페이지를 펄럭이는 텅 빈 한 권 冊이 되리라.
勝負를 알 수 없는 하루와의 싸움에서
우리는 패배했을까. 오늘도 물어보는 사소한 물음은
그러나 우리의 일생을 텅텅 흔드는 것.
午後 6時의 소각장 위로 말없이
검은 연기가 우산처럼 펼쳐지고
이젠 우리들의 차례였다.
두렵지 않은가.
밤이면 그림자를 빼앗겨 누구나 아득한 혼자였다.
문득 거리를 빠르게 스쳐가는 日常의 恐怖
보여다오. 지금까지 무엇을 했는가 살아 있는 그대여
오후 6시
우리들 이마에도 아, 붉은 노을이 떴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로 가지?
아직도 펄펄 살아 있는 우리는 이제 각자 어디로 가지?

Posted by Lynn*
Scrap/Poetry2008.03.15 21:51

맑디맑은 가을 하늘에
떨리는 가슴으로
그대 이름을 적습니다

한참동안
한 마디도 쓰지 못 하고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다가

끝끝내
아무 말도 쓰지 못하고
나직이 그대 이름만 부르다가

사랑한다는 말 대신에
빛깔 고운 단풍잎 하나
그대에게 보내 드립니다.

Posted by Lyn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