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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3.06 [롤랑 바르뜨] 사랑의 단상 - 검은 안경
Scrap/Book2010.03.06 00:22
감추기 cacher. 심의적délibératif인 문형.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대상에게 그의 사랑을 고백해야 할지 어떨지를 자문하는 게 아니라(이것은 고백의 문형이 아니다), 그의 정념의 혼란을(그 소용돌이를) 어느 정도로 감추어야 할지를 자문한다. 그 욕망, 그 절망감, 그 지나침(라신의 용어로 광란fureur*1이라는 것)을.


1. X가 나를 두고 바캉스를 떠나더니 전혀 소식이 없다. 무슨 사고가 일어난 걸까? 우체국이 파업중일까? 아니면 무관심, 거리감을 두려는 전략, 순간적인 충동적인 삶을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일까("그는 젊음에 취해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2 - 세비네부인)? 또는 단순히 아무 일도 아닌 걸까? 나는 점점 더 괴로워하며 기다림이란 시나리오의 모든 막을 거친다. 하지만 X가 이런저런 방식으로 해서 다시 나타난다면(그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물론 이 생각은 모든 고뇌를 즉시 소용없는 것으로 만들겠지만), 나는 그에게 뭐라고 말할 것인가? 내 혼란을(그때는 이미 끝난) 감춰야 할까("좀 어떠세요?")? 아니면 그것을 공격적으로("그 처사는 옳지 못했어요. 당신은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또는 열정적으로("당신 때문에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터뜨려야 할까? 아니면 그 사람을 진력나게 하지 않으면서 내 혼란을 넌지시 슬쩍 비춰야만 할까("좀 불안했어요")? 내 첫번째 고뇌에다 어떤 선전 문구를 택해야 할까 하는 두번째 고뇌가 나를 사로잡는다.

2.
(전략)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이 정념의 기호들이 그를 질식시킬지도 몰라라고 나는 중얼거린다. 바로 내가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감춰야만 하는 게 아닐까? 나는 그를 이중의 시선으로 쳐다본다. 때로는 대상으로, 때로는 주체로. 나는 독재와 봉헌 사이에서 망설이며, 그렇게 하여 자신을 공갈협박 속으로 몰아넣는다. 내가 그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가 잘되기를 바랄 의무가 있고, 그러나 그렇게 되면 나 자신은 상처받을 수밖에 없고. 함정이다. 나는 성인이 되거나 괴물이 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성인은 될 수 없고, 괴물이 되기는 원치 않는다. 그리하여 나는 얼버무린다. 나는 내 정념을 조금만 보여준다.

3.
내 정념에 신중함(태연함)의 가면을 씌우는 것, 바로 거기에 진짜 영웅적인 가치가 있다. (중략) 그렇지만 정념을(다만 그 지나침을) 완전히 감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인간이란 주체가 너무 나약해서가 아니라, 정념은 본질적으로 보여지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감추는 것이 보여져야만 한다. 내가 당신에게 뭔가 감추는 중이라는 걸 좀 아세요, 이것이 지금 내가 해결해야 하는 능동적인 패러독스이다. 그것은 동시에, 알려져야 하고 또 알려지지 말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내가 그것을 보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당신은 알아야만 한다. 내가 보내는 메시지는 바로 그것이다. "라르바투스 프로데오 Larvatus prodeo─나는 손가락으로 내 가면을 가리키면서 앞으로 나아간다*5 - 데카르트." 나는 내 정념에 가면을 씌우고 있으나, 또한 은밀한(엉큼한) 손길로 이 가면을 가리키고 있다. (후략)

4.
그 사람은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어떤 일 때문에 내가 울었다고 가정해보자(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사랑하는 육체의 정상적인 활동이다). 그리하여 그것을 안 보이려고 내 뿌예진[이것은 부인(否認)의 좋은 사례이다. 보이지 않으려고 시선을 흐리게 하는 것] 눈에 검은 안경을 썼다 하자. 이 몸짓의 의도는 계산된 것이다. 나는 동시에 모순되게도, 금욕주의적인 '의젓함'의 그 도덕적 이득을 취하려 하며(나는 자신을 클로틸드 드보로 간주한다), 또 그의 다정한 질문("무슨 일이오?")을 유발하고자 한다. 나는 동시에 가련하고도 감탄할 만한, 같은 순간에 아이이자 어른이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일종의 도박을 하는 셈이며, 자신을 위태롭게 한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이 별난 안경에 대해 전혀 물어보지 않을 수도, 또 그 사실에서 어떤 기호도 알아보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5.
(전략) 내 언어로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으나, 내 육체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내가 내 언어로 감추는 것을 육체는 말해버린다. 메시지는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지만, 육체는 조종할 수 없다. 내 목소리가 무엇을 말하든간에, 그 사람은 내 목소리에서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나는 거짓말쟁이이지(역언법에 의해), 배우는 아니다. 내 육체는 고집센 아이이며, 내 언어는 예의바른 어른이다.


Roland Barthes
Fragments d'un discours amoureux



*1 광란이란 단어는 17세기 프랑스 비극 작가 라신Racine의 [페드르]에서 자주 사용되는 말로 페드르는 의붓자식인 이폴리트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이렇게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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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y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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