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rap/Book2010.10.05 22:01
그들의 아파트로 들어가기 전날, 나는 정중하게 베르크씨에게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제2번 제2악장을 연주해달라고 부탁했다. 저녁이었으므로 베르크씨는 이웃들 모두에게 허락을 받아오면 연주해주겠노라고 말했다. 내가 당장 허락을 받아오겠노라고 말한 뒤, 밖으로 나가려고 문고리를 잡았을 때 피아노 건반의 뚜껑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미처 몸을 돌리기도 전에, 달빛을 받아 희미하게 반짝이는 밤의 사물들을 손끝으로 하나하나 매만지는 듯한 피아노 선율이 울리기 시작했다.

(중략)

"어둠이 서서히 내리는 저녁이에요. 동쪽 하늘을 파랗고 거기로 별이 떠올라요. 하지만 서쪽을 보면, 아직 빛이 남아있는 거죠. 요즘 베를린의 밤처럼 말이에요. 밤이 깊었는데도 사라지지 않는 빛. 모든 게 끝이 난다고 해도 인생은 조금 더 계속되리라는, 그런 느낌."

"해진 티셔츠, 낡은 잡지, 손때 묻은 만년필, 칠이 벗겨진 담배 케이스, 군데군데 사진이 뜯긴 흔적이 남은 사진첩, 이제는 누구도 꽃을 꽂지 않는 꽃병, 우리 인생의 이야기는 그런 사물들 속에 깃들지. 우리가 한번 손으로 만질 때마다 사물들은 예전과 다른 것으로 바뀌지. 우리가 없어져도 그 사물들은 남는 거야. 사라진 우리를 대신해서. 네가 방금 들은 피아노 선율은 그 동안 안나를 포함해 수많은 사람들이 들었기 때문에 처음과는 완전히 다른 곡이 됐어. 그 선율이 무슨 의미인지 당시에는 몰라. 그건 결국 늦게 배달되는 편지와 같은 거지. 산 뒤에 표에 적힌 출발시간을 보고나서야 그 기차가 이미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기차표처럼. 안나가 보내는 편지는 그런 뜻이었어. 우리는 지나간 뒤에야 삶에서 일어난 일들이 무슨 의미인지 분명하게 알게 되며, 그 의미를 알게 된 뒤에는 돌이키는 게 이미 늦었다는 사실을."


김연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pp. 376-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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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y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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